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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125m 지하에 홀로 매몰된 남자

by Pronician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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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M 지하에 홀로 갇힌 한 남자
367시간 45분 만에 구조된 구봉광산 매몰자

1967년 8월, 온 국민의 시선은 충남 청양군 구봉광산에 쏠렸다.

그곳에는 125m 지하에 홀로 갇힌 사람이 있었다.

 

1967년 8월 22일, 구봉광산에서 막장의 물을 퍼내는 일을 하고 있던 광부 양창선 씨 (당시 35세)

 

낮 12시 40분쯤 막장을 받치던 갱목이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지하 125m의 갱 안에 홀로 갇히게 된 양 씨

"갱도가 무너져 암흑천지가 됐고 추위 때문에  온몸이 떨렸다"

 

대피소로 몸을 피한 양 씨는 해병대에서 통신 업무를 했던 기억을 더듬어, 망가진 군용 전화기로 갱 밖의 사무소에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막상 구출은 쉽지 않았다.

 

'굴을 건드리기만 하면 헐어져 작업이 지지부진했기 때문'

- 1967년 8월 25일 자 중앙일보 -

 

양 씨는 그곳에서 홀로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파이프 설치가 거듭 실패해 음식을 전혀 전달받을 수 없었던 것

 

그에게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전부였다.

 

"처음 3일 동안은 몹시 배가 고팠다. 하루 이틀이 더 지나자 배에서 열이 나며 뒤틀리더라"

 

당초 일주일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구출은 점점 늦어졌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흙더미, 철근 등이 가득했고, 갱 내에 물까지 쏟아져 작업 진도가 더뎌졌기 때문이다.

 

구출 작업이 지연되면서 양 씨가 심한 탈수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모두의 염원이 모여졌기 때문일까, 1967년 9월 6일 오후 9시 15분,

367시간 45분 45초 만에 양창선 씨는 드디어 구출됐다.

 

175cm에 62kg이던 그의 몸은 45kg로 줄어들었지만 다행히도 건강은 양호한 상태였다.

 

그의 구출 소식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갱도 입구에는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몰렸고, 그가 병원으로 이송되는 길에 수많은 인파가 나와 "양창선 만세"를 외쳤다. 

 

국민들이 그의 귀환에 감동받았던 것은 극한의 상황에서 돌아온 양 씨에게 힘든 시절 세상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성씨는 양 씨가 아니라 김(金) 씨입니다... 전쟁통에 입대하면서 성이 잘못 등록되어서..."

 

사고 당시 그는 '양창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본명이 김창선이었지만 급박하던 6.25 당시 행정 오류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양 씨로 굳어졌다고 한다.

 

유일한 생존자 당시 35세의 김창선 씨는 좁디좁은 125m 어둠 속, 매몰된 대피소에서 15일 8시간 35분 동안 도시락 1개를 나눠먹고 소변, 빗물을 마시며 악착같이 버텼다.

 

지상으로 올라온 김창선 씨는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시력보호를 위해 선글라스를 낀 채 이송되는 김창선 씨를 본 아내와 어머니는 김창선 씨가 사망한 줄 알고 기절해 버렸다.

 

30년 동안 세계 광산 사고에서 최장기간 생존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던 김창선 씨의 생환은 천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침착한 대처와 강인한 정신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김창선 씨가 사고 직후 정신을 차렸을 때, 7m 남짓한 공간 대피소에는 빛을 읽어가는 손전등 하나만 커져 있고, 자신 외에는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린 김창선 씨는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고, 돌더미를 손으로 뒤집어가며 손전등 불이 꺼지기 전, 필사적으로 매몰된 통신선을 찾아내려 했다. 손바닥이 다 까졌지만 결국 손전들이 꺼지기 전, 통신선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18살 시절 해병대 학도병으로 입대, 통신병으로 6.25 전쟁에 참가한 김창선 씨는 도솔산 전투, 김일성고지 전투, 양도 전투, 장단지구 전투를 겪었고 이후 해병대 7기를 부여받고 53년 해병 일병으로 전역했다. 

 

소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고 8일 간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한 채 적 점령지에 고립되었다가 탈출한 경험도 있었고, 인민군, 중공군과 피를 피로 씻는 참호전을 겪기도 했으며, 적의 포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중대원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끊어진 통신선을 연결하러 전장을 기어서 이동했던 경험도 있었다.

 

1) 갱도가 붕괴되어 어둠 속에 혼자 고립되었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고 필사적으로 손전등이 꺼지기 전, 통신병 시절 특기를 되살려 통신선을 찾아 복구에 성공한 점

 

2) 17년 전의 한국전 참전 경험으로, 체내 염분농도가 떨어질까 봐 물을 마시는 것도 조절한 점

 

3) 음식이 없는 상황에서 5일 ~ 8일 간 버틴 경험이 있었다는 것

 

김창선 씨는 구출 후 병원에서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음식 생각이 간절하면서도, 내가 죽으면 마누라가 고생할 텐데... 경복(아들)이, 정애(딸) 중학교 가면 공납금도 내야 되고..."

 

"불이 꺼진 이후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가끔 들려오는 통신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시간조차 가늠이 가지 않고, 절망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꼭 살아나가서, 아들 딸은 끝까지 공부시키겠다. 반드시 살아 나가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버텼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창선 씨는 이후 충남에 거주하였으며,

2022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고, 2월 7일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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