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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광복 직후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인들

by Pronician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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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약 70만 명가량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이미 재조선 일본일 중 3할 이상이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일 2세였는데,

 

이들은 조선이 '독립'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총독부는 이들을 위해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강좌 정원은 순식간에 마감됐고,

 

일주일 만에 학급을 증설하는 등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처음부터 재조선 일본인의 잔류를 용인할 생각이 없었고,

 

1945년 10월 3일, 재조선 일본인의 단계적 귀환을 지시했습니다.

 

직업이나 신분을 고려한 단계적 송환이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당장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경성 제국대학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는

 

조선 사람이 자신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일,

게으름을 피우지 말라고 닦달하는 일 등을 겪고는

 

참기 힘든 굴욕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특히 목욕탕에서 일할 때 조선인들이 자신에게

 

"이런 일을 하는 걸 보면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패전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모습을 보게된다." 며

 

감상을 말하는 것이 무척 굴욜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에 있던 대다수의 목욕탕은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고,

 

소수를 제외하면 조선인을 출입 금지였습니다.

 

차별로 인해 소란이 발생하자 조선총독부에서조차

 

목욕탕 입장에 차별을 두지 말라고 지시했지만

 

"조선인은 게으르며 난폭한 오물 덩어리다.

걸어 다니는 세균이며 전염병 보유자다." 라면서

 

총독부에 벌금을 낼지언정 조선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목욕탕에 조선인과 함께 있다는 상황 자체부터가 굴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일본제국은 일본 열도를 내지, 그 외의 식민지를 외지라고 불렀습니다. 

 

이때 패전 이후 이 '외지'에서 귀환하는 사람을 '히키아게샤'라고 불렀는데,

 

처참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견디며 귀환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에게 닥칠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1947년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한 수용소 상황을 보면

 

1,400여 명을 수용했던 이곳은

 

임시 가건물의 바닥에 깔아놓을 거적만 있을 뿐

 

그 외에 다른 것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열악한 수용환경 외에도 이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일본 사회 전반에서 이들을 냉대하며 철저히 외면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사회는 히키아게샤를 향해

 

"전염병을 퍼트리고 다닌다." 라고 말했는데, 

 

한편 이러한 시선을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대하는 시선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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