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규모 9.0
사망자 18,182명
실종자 2,172명
부상자 6,126명
동북부 이와테(岩手)현서도 대지진에 이은 쓰나미로 8,000여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이와테현 북부 후다이(普代) 마을에선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다.
쓰나미가 덮친 일본 해안지역에서 직접적 사망자가 전혀 없는 유일한 지역
지진 발생 당일, 인구 3,000명의 이 마을에도 14m 높이의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주민들을 살린것은, 높이 15.5m, 길이 155m의 방조제와
높이 15.5m, 길이 205m에 달하는 수문
방조제는 1967년, 수문은 84년 완공되었다.
이 마을은 1896년, 1933년에 두 차례 대형 쓰나미를 겪었고, 5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촌장은 1933년 쓰나미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생존자.
또한,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1896년에, 15m 쓰나미가 몰려왔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촌장은 "예산 낭비"라는 주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높이 15m 이상의 방조제와 수문 건설을 밀어붙혔다.
당시 옆 도시였던 미야코시의 10m 방조제도 '만리장성'으로 불리며 '규모가 너무 크다'는 소리를 들으며 비판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촌장은 수십년간 정부, 지자체를 설득하고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방조제와 수문을 완성시켰고, 사망 당시까지 손가락질 받았다.
이미 80년대 후반에 고인이 된 촌장의 고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2011년 도호쿠 대지진 당시 증명됬다.
'만리장성'으로 불렸던 미야코시의 10m 방조제는 14m에 달하는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미야코시는 쓰나미가 방조제를 넘어와 마을이 초토화되고 수백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으나, 후다이 마을은 14m의 파도에도 굳건했다. 당시 방조제 밖에 있던 1명이 실종된 것을 제외하면, 단 한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항구 작업 시설이 파괴된 것에 그쳤고, 당시 항구에서 뒤늦게 방조제 안으로 대피했던 사람들은 신발도 젖지 않았다.
60년대에 홀로 방조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고군분투했던 와무라 촌장.
2016년 3,000여명의 후다이 마을 주민들은 와무라 촌장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2번이나 겪었던 것을 3번 겪을 수는 없다."
- 와무라 고토쿠 (和村幸得) 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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